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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야 솟아나라

Ink on the Road 2023. 12. 15. 03:57

생각을 다시 가다듬은 결과.. (나의 작업은 감정을 담는가? 구체적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표출하고 싶은 형상은 메시지가 아닌 개인적 감정이 맞는 듯합니다.

이미 환경이라는 테마 스스로가 주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있기 때문에 이를 굳이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따라서 상품을 소비하고 분리수거를 하는 행위 속에서 파생하는 혼돈스러운 감정을 담는 그릇으로서 미디엄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혼돈은 상황과 인지 - 감정은 양가적인 것

 

보편적인 메세지란?

시대적 맥락 속에서, 특히 독일 사회에서 환경이라는 테마는 시급히 보호하고 되살려야하는 대상으로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미 이를 위해 기존 인식에서 벗어나 사고하려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내가 굳이 이 단순하고 명확한 메세지를 노골적으로 작업에 끌고 올 이유가 없다. 이미 이 메세지는  충분히 프로파간다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메세지에 동의하는 한 인간으로서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와 순간들을 붙잡아 끌어내고 싶다. 

 

 


1.

순환에 대해 생각하다가.
매일 분리수거에 집착하는 나를 보다가.
쓰레기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나의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순환을 노래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가...

“그럴듯함”
순환에 대한 믿음
모든 것이 신뢰로 돌아가는 것인데.

 

마트에서 소비하고
다 긁어 파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함에 넣고
마트에 가서 또 다시 소비하고

이 시스템의 굴레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행하는 나의 반복적 행위가 때로는 시시포스의 영원한 형벌처럼 느껴진다.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내 행위가 쓰레기들을 심폐소생시킬 것이라는 ‘믿음/희망’을 갖는 것이다.

 

 

내가 썼다는 생각을 지우고. 이 글에 대한 주석을 단다면? 

 

형벌이라는 단어가 유독 폭력적으로 느껴짐.

 

 


2.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일회용을 소비하는 습관,

순환의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분리수거함에 공병을 넣는 행위.

 

통계는 암울한 재활용률을 보여준다. 자료들 수집

그렇다. 나는 이 공병들이 재활용되는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없다.

나의 행위가 과연 모래알만큼의 영향력이라도 있는지 의심이 싹트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재활용되는 것도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위안을 얻는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이 성실한 행위를 반복한다. 

실천은 믿음을 만나 굳게 실현되리라!

 

이 두 밑음은 같은 밑음?

Yes

내가 정해놓은 가상의 세계가 있다는 지점에서?

 

나는 주술사가 될 거다.

 

 

 

 


3.

희망의 빛이라는 클리셰.

빛이 꺼졌다 켜졌다.

어둠과 밝음

비가시적 가시적

희망이 있거나 없거나

0과 1

둘 중 하나지만

이 무수한 조합의 반복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빛이 많은 어느 날은 초점이 선명해지기도 한다.

 

** 플루서의 gesture of shaving

 

 

이 빛은

등대의 빛? 은 아니고 달빛 같은 거다. 

 

빛은 움직임을 만든다.

아니, 기존의 운동성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도 이 운동은 여전히 존재하는 중이다. 내가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 못했을 뿐.

나의 행위, 나의 움직임, 나의 운동.

널 다시 돌아오게 할 나의 에너지.

빛이 존재하는 날은 에너지가 더욱 강하게 요동친다.

 

#달

#인력

#자석 

#집중과 초점

 

 

* 등대와 달빛

 

등대는 표식. 상당히 수동적이다.

등대의 목적은 빛으로 바다를 비추는 것에 있지 않다.

항행하는 배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표식으로써 등대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래서 등대의 불빛은 직선적이다. 주변을 사려깊게 살피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나는 항행하는 배들이 등대보다 능동적인 주체로 여겨진다. 

나는 등대보다 더 능동적인 성질의 빛을 원한다. 주변의 관계를 살피는 깨달음이 있는 빛.

(사실 달은 스스로 빛을 뿜는 존재는 아니지만 뭐 어쨋든)

그리고 빛과 함께 달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나의 감정과 상황은 0과 1처럼 이분법적이다. 그러나 자연은 앞뒤가 없고 대칭적이지 않다.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으로. 인간적 인식의 틀에서 한발짝 물러나서, 내 작품, 나의 태도, 희망을 노래하는 나의 에너지는 직선적이 되어야 한다.  

 

 

인력 引力 gravitation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물체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나 서로 다른 부호를 가진 전하들 사이에 작용하며, 핵력 때문에 소립자들 사이에서도 생긴다.

 

 


[참고글]

 

일방향성
  화살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앞뒤 구분이 있다. 대칭되어 있다. 마주보고 있다. 이는 인간의 관점이고 자연은 앞뒤가 없다. 인간의 관찰과 자연의 실재 사이에 결어긋남이 있다면 어디에 맞추어야 하겠는가? 인간이 자연에 맞추어야 한다.
  인력과 척력, 진보와 보수, S극과 N극, 선과 악, 중력과 부력, 정의와 불의의 대칭은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는 방식일 뿐 자연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모든 대칭은 가짜다. 자연은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은 대칭을 관통하는 일방향성이 있다. 
  대칭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연결이다. 자연은 주는 자가 있을 뿐 받는 자가 없다. 화살은 일방적으로 날아와서 박힌다. 과녁이 유혹하여 화살을 빼먹는 것인가? 비는 일방적으로 내리고 바람은 일방적으로 분다. 자연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부력은 없다. 물의 중력이 누르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배가 뜬다. 실제로 변화를 격발한 것은 중력이다. 중력이 일방적으로 가만있는 배 밑으로 파고든다. 변화의 엔진은 중력에 있다. 배는 자발적으로 뜬 게 아니라 물의 압력에 떠밀린 거다.
빛은 광자가 있고 어둠은 암자가 없다. 척력은 있고 인력은 없다. 궁극적으로 우주에 방향전환 메커니즘뿐이다. 안에서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자발성 있어야 한다. 자체 동력 없이 외력에 떠밀리면 가짜다. 우리가 아는 세상의 반은 가짜다.

방향전환
  작용에 반작용은 없다. 반작용은 작용의 방향전환이며 작용의 말단부로 종속된다. 두 화살표 -> <-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화살표 ->와 그 화살표의 방향전환이 있다. 그것이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내부에 대칭을 품은 에너지의 비대칭이다.
  우리는 대칭 짓기 좋아한다.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 낮과 밤이 대칭되어 있지만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편의다. 대칭은 타인에게 전달하기 좋은 세트 메뉴다. 자연은 그냥 있다. 하늘과 땅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 중심 사고의 왜곡이다. 
  우주는 원소의 집합이 아니라 메커니즘의 복제다. 하나의 활이 많은 화살을 쏜다. 과녁에 날아와 박힌 많은 화살을 보고 인간은 많은 원소가 집합되었다고 착각한다. 활과 과녁은 대칭이다. 대칭은 인간의 관점일 뿐 에너지로는 비대칭이다. 
  인류는 문명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80억이 일제히 우스꽝스러운 바보짓을 한다. 자연과 인간의 결이 어긋나면 인간이 자연에 맞추어야 한다. 자연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맞게 인식과 사유의 메커니즘을 기초부터 새로 빌드업해야 한다.
  세상을 대칭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 이원론적 사유의 교착상태를 극복하고 에너지의 일방향성을 따르는 메커니즘적 사고, 일원론적 사유로 도약해야 한다. 인간에 의해 왜곡된 2를 자연의 순수한 1로 환원시킬 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간 구성에 관하여

 

디지털/ 아날로그

관객참여형?  혹은 키네틱

- 벡터의 개념에 대하여

 

 

리사이클링아트에 대하여...

 

re'cycle'이 아닌 re'new'

재'활용'이 아닌 재'탄생'

아무 목적없이 쓰레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짝 유보하는 작업일 뿐.

이런 작업들은 오브제가 가진 본래의 목적에 맞게 순환되게끔 하는 것과는 궤가 다르다. 

 

 


미래와 과거가 아닌 현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