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k on the Road 2023. 12. 30. 02:03

짧은 개인적 역사

 

 

 

어렸을 적부터 그림 외길 인생이었던 그 흐름을 따라 정해진 코스처럼 예술 고등학교 미술과를 택하여 진학했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 무용과나 음악과의 공연을 접하며 벽에 걸려있는 캔버스는 상대적으로 생명력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로 인해 캔버스에서 벗어난, 시간을 함께하는 표현 수단을 찾고 싶었다. 이때 나는 작품에 현장성도 있고 강렬한 감각을 표현하고싶은 욕구가 강했고 영상매체가 나의 이러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미지와 (그 당시 나의 생각으로) 사운드, 움직임의 결합으로 현장감과 생명성을 함께 담은 ‘영상’을 내 표현수단으로 끌고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 이후 내 안에서 혼란이 시작되었다. 화려한 움직임과 기교가 눈을 즐겁게 했지만 내 마음 한켠에 내재된 공허함이 멋진 영상들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이걸 배워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려지지 않았다. 영상매체가 나의 표현수단으로서 적합하지 않은걸까 싶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졸업학년에 학점을 채우기 위해 ‘인문학 특강’이라는 다른 학과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수업에서 교수님들이 인간과 예술에 대한 존재와 태도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다. 이 때부터 나는 생각과 질문 끌어내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나는 누구인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를 관찰하고 질문했다. 수업이 있던 아침 9시만큼은 졸림이 없고  가슴이 알싸하게 두근거리던 그 띵한 감각이 선명하다. 나는 알에서 깨고 나온 한마리의 새였다. 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

 

나와 잘 맞는 미디엄을 찾기 위해 학교에서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고자 했다. 뒤늦게 알게 된 인터렉티브 영상 작품을 보며 이런 작업방식이나 설치영상도 배우고 싶었으나 멀티미디어 영상과에는 해당 커리큘럼이 없어 불만이 있었다. 타과 수업 청강도 안되고 스스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혼란하고 힘도 부족하여 방황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속한 이 학과는 광고, 모션 디자인, 3D 등 커머셜 영상을 다루는 전공이었다. 즉, 영상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것이 주 목적인 과정인 것이다. 내가 학과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뭐 그래도 배움을 통해 기술적인 역량을 어느정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랜서로 활동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갈수록 내 영혼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내 작품을 해내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지독히 깨달았다. 오롯이 내 언어가 되어줄 미디엄을 발굴하면서 내가 곧 작품이며 작품이 곧 내가 되고 싶은 거지 예쁘고 멋진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자로 인생에 점을 찍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 진정한 아티스트로서 인생을 살기위한 다짐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새로운 시도 앞에서 백지장 종이와 검은 화면이 두려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나의 아주 사적이고 솔직한 것들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주 사적인 것. 아빠의 죽음과 한번도 들춰보지 않고 지나쳤던 나의 내면적 이야기를 해부하는 마음으로. 마치 5년전 먹다 남긴, 어디까지 어떻게 썩어있을지 모르는 치킨박스를 열어보는 것 같은 공포감. 과정 초반에는 내 스스로가 참 부끄럽고 벌거벗은 기분이었으나 견디며 작업을 구성하고 이미지화 시켜갔다. 말 그대로 내가 회피하지 못하도록 내 멱살을 잡고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채로. 신기한 것은 작업을 하며 시간이 흐를 수록 나의 과거와 이로부터 파생된 현재의 내 모습까지 마주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해졌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며 수행한 작업은 나를 위로했고 나를 인정했다. 이 연속된 작업을 통해 나 자신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다시 한 번 알을 깨고 나왔다.

 

내면의 해방과 함께 시선이 외부로 향한다. 내가 진심으로 가슴뛰어하는 것, 그러했던 사건들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사람…세상..난 사람과 세상을 알고싶은 거다. 그리고 그걸 내 언어로 표출하고싶은 거다. 다시 시작함에 따라 내 자신과 세상, 모든 존재의 관계를 탐험하고 있다. 작업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머리를 찢는 고통이다. 그 고통도 나에겐 기쁨이며 이를 통해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더욱 큰 기쁨이다. 나는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고 더더욱 사랑하고 싶다. 깊게. 넓게. 나 혼자서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